Hanjin Kim

소련이 잿더미가 되기까지 - 메모

소련은 자본주의의 병을 진단하는 데는 탁월했다. 문제는 그 진단서로는 약을 지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소련 경제가 무너진 것은 계획이 어설퍼서가 아니다. 계획을 세운 논리 자체가,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는 쓰일 수 없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구의 결함은 자본주의와 견주어야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세운 전제 안에서 이미 보인다.

마르크스는 가치의 실체가 노동이라고 했다.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만든다는 설명은, 자본가의 이윤이 어디서 나오는지 폭로하는 칼이었다. 그러나 칼은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데 쓰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이라는 말이 작동하려면 그 필요를 아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시장 가격이 사라진 경제에는 그 주체가 없다. 국가가 가격을 정하면 가격은 수요의 신호가 아니라 국가의 의견이 된다. 소련은 수많은 가격을 하나하나 행정적으로 정했고, 그 가격들은 서로를 검증하지 못했다. 가치를 측정할 잣대를 스스로 없앤 것이다. 그래서 계획은 가격 대신 물리량을 골랐다. 톤과 개수와 미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질을 모르고, 구성을 모르고,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못을 톤으로 세는 계획 앞에서 가장 합리적인 공장은 무거운 못을 만든다. 계획 지표를 채우는 일과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일이 갈라지자, 경제는 계획을 위해 돌기 시작했다. 가격이라는 추상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추상을 버리면, 그 추상이 운반하던 정보까지 함께 버려진다. 수량의 독재는 가격의 독재보다 거짓말을 더 잘 숨긴다.

소련의 경제는 인간에 대한 하나의 가정 아래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므로,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노동 자체가 보상이 되어야 한다는 가정 아래 세워졌다. 초기의 소련은 물질적 보상보다 도덕적 인센티브를 앞세웠다. 사회주의 경쟁, 충성, 영웅 노동자. 그런데 영웅은 있어도 대중은 없었다. 자기가 파는 석탄이 계획을 채우고 국가를 먹인다는 추상적 명제로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는다. 국가는 먼저 임금 격차를 부활시켰다. 평등주의가 반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사라지면서. 그래도 부족하자 1940년에는 직장을 무단으로 떠나는 것을 범죄로 만들었다.

소련은 농민에게서 곡물을 강제로, 낮은 가격에 사들였다. 이는 소련 공업화의 자금의 조달 방식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원죄로 고발한 원시축적이, 국가의 손으로 더 크고 더 조직적으로 재현된 것이다. 착취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착취가 국유화되었다. 자본가의 사적 소유를 없애는 일과 추출의 구조를 없애는 일은 다른 일인데, 소련은 전자만 실행했다. 그리고 차이는 검증의 유무로 벌어졌다. 자본가의 이윤은 시장이라는 검증 앞에 섰지만, 국가가 추출한 잉여가 어디에 쓰이든 그것을 검증할 장치는 없었다. 검증을 받지 않는 추출은 효율을 묻지 않았고, 효율을 묻지 않는 축적은 언젠가 벽에 부딪힌다.

마르크스는 돈의 지배가 사라진 사회를 꿈꿨다. 소련은 돈을 없애지 않았지만 돈의 뜻을 빼앗았다. 기업이 쓰는 돈은 계획 배분의 회계 수단이었고, 실패해도 망하지 않았다. 파산이 없는 기업은 계산할 이유가 없고, 자재를 계획으로 받는 기업은 아낄 이유가 없다. 부족하면 비축하고, 비축이 다시 부족을 낳는다. 부족은 소련 경제의 기후가 되었다. 돈의 지배를 부정한 경제는 결국 두 종류의 돈을 낳았다. 계획을 위한 돈과 일상을 위한 돈, 공식 경제와 그림자 경제. 그냥 단순히 인플레이션이라고 봐도 된다. 그 결과 화폐가 하던 일, 결과를 측정하고 잘못을 처벌하는 일을 대신할 장치가 없었다.

이 실패들은 하나의 구조를 공유한다. 소련은 자본주의의 결함이 자본주의의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측정의 어려움, 유인의 왜곡, 추출의 폭력, 규율의 상실. 그러나 그것들은 시장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희소성이라는 조건에서 나온다. 1991년, 그들이 세운 경제가 잿더미가 되었을 때 거기서 이긴 것은 미국도 자본주의도 아니다. 그들이 부정하려 했던 현실이 이긴 것이다. 현실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희소성 아래에서 무엇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만들지를 결정할 장치. 그것을 거부하는 경제 논리는, 아무리 정합적이어도, 끝내 스스로를 부정한다.

그렇게 소연은 이상 아래에 재더미가 되었다.